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TVING 드라마 <우씨왕후>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역사 속 인물, 우씨왕후에 대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저는 아직 드라마를 보지 못해서 드라마 내용은 모르고, 역사 속 고구려 우왕후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고구려 역사 속에서 ‘우씨왕후’는 두 명의 왕과 혼인한 특별한 인물로 기록됩니다. 그녀는 고국천왕과 산상왕, 두 왕의 왕후로 지낸 여성으로, 우리나라 역사 속 수많은 왕비 중에서도 매우 특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단순한 왕후 이상의 존재로, 고구려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간 대담한 여성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그녀의 선택과 행동들은 고구려 왕권과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1. 권력을 가진 왕후의 등장
우씨왕후는 이름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구려의 절노부(=연나부=제나부) 출신 '우소'의 딸이라는 사실로 인해 '우왕후', ‘우씨왕후’라고 불립니다. 절노부는 고구려에서 매우 강력한 권력을 가진 왕비족이며, 고구려 내에서 실질적으로 왕실에 버금가는 힘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의 왕후로 등극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깐, 고구려 5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고구려의 5부(소노부(消奴部)·계루부(桂婁部)·절노부(絶奴部)·관노부(灌奴部)·순노부(順奴部))는 고구려 사회에서 중요한 씨족 집단이었으며, 각 부는 왕실과 군사, 행정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구려의 왕은 연맹장으로서 5부의 수장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왕이 연노부에서 나왔으나 중앙집권화가 진전되며 왕족은 계루부의 고씨(高氏)로 고정되었습니다. 왕은 계루부에서, 왕비는 절노부에서 대대로 배출되었고, 이 5부는 고구려 초기부터 왕국의 정치, 사회, 군사 구조를 형성하며 정치를 주도하고 사회적으로도 높인 지위를 누렸습니다.
서기 180년, 고구려 9대 왕인 고국천왕과 혼인한 우씨왕후는 당시 고구려 정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출신 배경을 바탕으로 왕실과 절노부 귀족 세력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왕실 내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 좌가려의 반란과 첫 시련
서기 190년, 우씨왕후에게 첫 번째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우씨왕후의 친척인 좌가려와 어비류가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등 부패한 행동을 저질렀고, 이는 고국천왕의 노여움을 사게 됩니다. 고국천왕은 그들을 처벌하려 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좌가려와 그의 추종자들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반란은 절노부의 4대 가문이 함께 가담하며 고구려 왕성까지 공격하는 큰 사건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은 고국천왕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좌가려를 포함한 반란 주동자들은 모두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우씨왕후가 속한 절노부는 큰 타격을 받았고, 우씨왕후의 입지도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절노부의 권세는 점차 약해졌으며, 왕후로서의 우씨의 권력도 크게 감소했습니다.
더군다나 우씨왕후는 고국천왕과의 결혼 생활 동안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왕의 사랑을 잃어가는 처지였습니다. 고국천왕의 관심은 점차 다른 곳으로 향했고, 왕후로서의 위치마저 위태로워졌습니다. 이는 그녀에게 큰 상처와 고립감을 안겨주었고, 우씨왕후는 이러한 절망 속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3. 왕을 선택한 우씨왕후의 놀라운 결정
서기 197년, 고국천왕이 재위 19년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태자가 없는 상태에서 차기 왕을 결정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에 우씨왕후는 매우 대담한 결정을 내립니다. 그녀는 단순히 왕후로서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 차기 왕을 자신이 직접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로 하고, 곧바로 왕궁을 빠져나가 시동생 발기를 찾아갑니다. 그녀는 발기에게 자신이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발기는 자신이 왕위 계승 1순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씨왕후의 도움을 무시하며 그녀를 모욕하는 말을 내뱉습니다. 이에 우씨왕후는 발기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곧바로 발기의 동생 연우를 찾아갑니다.
4. 산상왕의 등극과 우씨왕후의 권력 복귀
연우는 발기와 달리 우씨왕후를 극진히 대접하며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우씨왕후는 연우를 왕위에 오르게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두 사람은 서로의 뜻을 맞춰 고국천왕의 유언을 꾸며냅니다. 그리하여 연우는 고구려 10대 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그는 산상왕이 됩니다. 이로써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에 이어 산상왕을 통해 다시 한 번 왕후의 자리에 오르게 되며, 그녀의 권력은 다시 회복됩니다.
5. 발기의 반란과 그 최후
그러나 억울하게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긴 발기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궁을 포위하고 산상왕에게 왕위를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백성들은 고국천왕의 유언이라고 믿으며 산상왕을 지지했고, 발기는 결국 가족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소노부의 3만 가구와 함께 요동땅으로 달아나 후한의 요동태수 공손도에게 군사를 빌려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막내동생이자 고구려 장군이었던 계수와의 싸움에서 지며 실패로 끝났고, 발기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6. 형사취수제와 우씨왕후의 결혼
우씨왕후가 두 왕과 혼인한 사실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결혼 풍습인 형사취수제에 기인합니다. 형사취수제는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는 풍습으로,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와 흉노에서도 나타난 풍습입니다. 이는 당시 남성들이 전쟁으로 인해 일찍 죽는 일이 빈번했던 사회에서 과부가 된 여성들의 생계를 보장하고, 집안의 노동력과 출산력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인 풍습이었습니다.
이 풍습을 통해 고구려 사회는 여성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시에 가문의 자산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결혼 관행은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며, 왕실에서도 형사취수제가 널리 행해졌습니다. 우씨왕후 역시 이 풍습에 따라 형 고국천왕이 죽은 후, 동생 산상왕과 재혼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이러한 풍습을 극도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조선의 역사서에서는 우씨왕후가 패륜적이고 음란한 여인으로 기록되었으며, 그녀의 행동을 윤리적으로 비난했습니다. 그래서 우왕후를 천추태후와 장희빈과 함께 3대 악녀라고 불렸다고 하지만 고구려 사회에서는 우씨왕후의 결혼이 전혀 문제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녀의 가문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7. 두 번째 왕후로서의 삶
산상왕의 왕후가 된 우씨왕후는 고국천왕 시절보다 더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녀는 산상왕을 능가하는 영향력을 가졌으며, 고구려 정치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산상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낳지 못했고, 이로 인해 고구려 왕실에서 후계자의 부재는 왕권 안정에 치명적인 문제로, 이는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산상왕은 꿈에서 하늘의 계시를 받습니다. 꿈에서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 말라"는 신성한 메시지가 전해졌습니다. 몇 년 후, 제사용 돼지가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 돼지를 잡은 인물이 바로 후녀라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산상왕과 후녀의 만남 이후, 후녀는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우씨왕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위협하는 후녀와 그녀의 아이에게 질투심을 느꼈고, 후녀는 암살 위기에까지 처하게 됩니다. 후녀는 자신의 뱃속 아이가 산상왕의 자식임을 밝힘으로써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후녀는 마침내 아들을 낳았고, 산상왕은 이를 매우 기뻐했습니다. 산상왕은 이 아들을 "하늘이 주신 아들"이라 여겼으며, 그의 이름을 교체(郊彘)라 지었습니다. 이 아들은 후에 고구려 11대 왕인 동천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후녀는 산상왕의 신임을 받아 소후로 봉해졌습니다.
하지만 우씨왕후는 교체를 자신의 자식처럼 대하지 않고 괴롭혔습니다. 태후가 된 이후에도 그녀의 권력욕은 여전했고, 이는 고구려 정치와 왕실 내에서 그녀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이로 인해 절노부는 다시 고구려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게 되었고, 그녀는 절노부의 실질적인 수장으로서 고구려의 정치권을 장악했습니다.
8. 우씨왕후의 죽음과 평가
우씨왕후는 생전에 두 명의 왕과 혼인하고, 뛰어난 정치 감각과 강한 의지로 고구려 정치에 깊이 관여한 강력한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뿐 아니라 그 어떤 나라에서도 형제와 결혼해 왕후에 자리에 두 번이나 올랐던 여성은 없을 정도로 특별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고국천왕과 산상왕의 왕후로 지내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갔고 절노부의 세력을 강화하며 고구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권력과 질투, 정치적 갈등으로 가득 차 있었고, 이는 고구려 내에서 수많은 반목과 다툼을 일으켰습니다.
우씨왕후는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고 반성하며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두 왕과 결혼한 사실에 고국천왕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는지 아니면 산상왕을 개인적으로 더 좋아했는지 알수없지만 죽은 후 산상왕릉 옆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원래 형사취수제로 두 번 결혼한 경우 첫 번째 남편과 묻히는 게 의례지만 우씨왕후는 두 번째 남편이었던 산상왕릉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묻힌 후 무녀가 고국천왕이 꿈에 나타나 분노하며, 우씨왕후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에 고국천왕릉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고국천왕의 분노를 잠재웠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9. 고구려 여성의 독립적 삶을 상징하는 우씨왕후
우씨왕후의 일대기는 고구려 여성들이 얼마나 독립적이고 강인한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녀는 두 번이나 왕후가 된 유일한 인물로서, 그 누구보다도 대담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고구려 왕가와 연나부라는 막강한 세력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졌고,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우씨왕후의 삶은 고구려 여성들이 순종적으로 남편을 따르며 자식을 기르는 모습이 아닌, 정치적 역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며 사회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녀의 선택과 행동들은 유교적 가치관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당시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 속에서는 어쩔 수 없었던 당연한 선택이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씨왕후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녀는 과연 여걸이었을까요, 아니면 악녀이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역사 속 인물을 단순히 옳고 그름으로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고, 그 속에서 우리 스스로의 생각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우씨왕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더욱 흥미로운 역사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